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야마모토 코지 (문단 편집) === 프로 시절 === [[파일:external/blog-imgs-54.fc2.com/11161.jpg|width=150]] 1968년 드래프트[* 일본프로야구 사상 희대의 황금 드래프트로 손꼽힌다. 야마모토, 타부치, 호시노 외에도 1순위 지명자들만으로도 [[히가시오 오사무]], [[야마다 히사시]], 아리토 미치요 등의 [[명구회]] 회원이 등장했고 하위 지명에서도 [[후쿠모토 유타카]], [[가토 히데지]], [[오시마 야스노리]] 등 명선수들이 줄줄이 배출되었다.]에서 고향팀인 [[히로시마 도요 카프]]의 1위 지명을 받으면서 프로야구계에 발을 들였다. 이 당시 한자명은 '''山本浩司'''.[* 발음은 동일] 입단 당시 등번호는 27번이었지만 1971년, 팀의 주력 타자이던 [[야마우치 카즈히로]][* 前 [[롯데 오리온즈]], [[주니치 드래곤즈]] 감독.]가 은퇴하면서 8번을 물려받았다. 데뷔 첫 해인 1969년 시즌 후반에 4번 타자로 뛰기도 하는 등 [[나름]] 활약을 펼쳤고 이후 히로시마의 주력 1번, 3번, 5번 타자로 뛰었지만 타격은 특별한 점 없이 평범한 중거리 타자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이후 실력이 성장하며 주로 팀의 3번 타자를 맡게 되었고 비슷한 시기 입단한 [[키누가사 사치오]], 미즈타니 지츠오 등과 함께 카프의 자체생산 중심 타선을 이루게 되었다. 1974년 시즌 타율 0.275, 28홈런, 74타점 이란 훌륭한 성적을 기록하였다. 이듬해인 1975년부터 한자명을 '''山本浩二'''로 바꾸고 본격적으로 히로시마의 4번 타자를 맡은 야마모토는 꾸준한 타격 페이스를 보이며 그 해 [[주니치 드래곤즈]]의 [[이노우에 히로아키]]와 시즌 말까지 치열한 경쟁을 벌인 끝에 타율 0.319로 센트럴리그 수위타자 타이틀을 따내고[* 다만 이 과정에서 흑역사가 있었는데, 주니치와의 최종전에서 [[고바 타케시]] 감독의 결정에 의해 [[박용택|야마모토는 그 경기에 선발출장하지 않고(전 경기 출장 기록 때문에 경기 후반 대주자로 나왔다.) 이노우에는 '''무려 NPB 최초의 만루 고의사구'''로 걸러버리는 등의 비열한 작전]]으로 수위타자 타이틀을 가져올 수 있었다(...) ~~그렇다. [[김재박]], [[김영덕]], [[김성근]]의 원조다.~~ 그리고 이게 더 문제인 건 이노우에는 원래 [[히로시마 도요 카프]]의 드래프트 1위 출신이자 야마모토와는 한때나마 팀 동료였다는 것이다. 천만다행히도 주니치의 잔여경기가 남아있어서 이노우에는 최종전 첫 타석에서 안타를 치고 교체되거나 2안타 이상을 치면 수위타자를 가져올 수 있었으나, 최종전에서 첫 타석 유격수 땅볼 이후 두 번째 타석에서 안타(2루타)를 쳤고, 특히나 마지막 타석에서 [[데드볼]]을 맞으며 결국 수위타자를 놓치면서 피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30홈런, 84타점, 24도루를 기록하며 시즌 [[MVP]]까지 수상한 데다 팀은 창단 최초로 센트럴리그 우승을 따내는 등 최고의 한 해를 보냈다. 이때부터 야마모토는 '''{{{#ff0000,#ff0000 미스터 붉은 헬멧}}}'''이라 불리기 시작했다. 20대 시절 야마모토의 타격도 나무랄 데 없었지만, 30대에 접어들면서 야마모토의 장타력은 더욱 두각을 드러내었다. 대학 시절부터 고질적인 허리 통증으로 고생하던 야마모토는 스윙할 때 허리에 부담을 줄이려고 밀어치기 중심으로 타격했는데 그러다 자연히 스프레이 히팅을 습득하며 우측 펜스를 넘기는 빈도가 늘면서 장거리 타자로 성장하게 된 것이다. 1977~1981년 5시즌 연속 40홈런을 기록했고[* 이는 [[오 사다하루]]와 함께 유이한 기록이다.], [[한신 타이거스]]의 [[카케후 마사유키]]와 홈런왕 경쟁을 벌이며 1978, 1980, 1981, 1983년 시즌에 걸쳐 통산 4회의 홈런왕 타이틀을 석권하고 타점왕도 3번을 획득했다. 특히나 1978년의 사상 첫 홈런왕은 [[히로시마 도요 카프]] 구단 사상 최초의 홈런왕 배출이었기에 더욱 의미가 있었다. 참고로 1978~1984년 사이에 야마모토가 홈런왕을 차지하지 못한 해는 카케후 마사유키가 홈런왕을 차지했다.[* 중간에 [[주니치 드래곤즈]]의 [[오오시마 야스노리]](1983년)과 [[우노 마사루]](1984년)가 공동수상하긴 했다. 그리고 1985년 이후부터는 저 둘의 기량이 떨어지며 은퇴 수순을 밟고, [[한신 타이거스]]의 [[랜디 바스]]가 삼관왕을 먹으며 날뛰게 된다.] 또한 [[중견수]] 수비도 일품이어서 1972~1981년 까지 10년 연속 [[골든글러브(NPB)|다이아몬드 글러브]]를 수상했는데 이는 [[센트럴리그]] 외야수로선 역대 최고 기록.[* [[퍼시픽리그]] 역대 최고 기록 겸 [[NPB]] 역대 최고 기록을 가진 사람은 다름아닌 [[후쿠모토 유타카|前 세계의 도루왕]].] 거기다 발도 빨라서 11년 연속 두 자리수 [[도루]]를 기록한 말 그대로 [[5툴 플레이어]]의 전형적인 선수였다. 1983년 시즌 부터는 포지션을 [[좌익수]]로 변경했고 그 해 4월 30일 [[한신 타이거스]] 와의 [[한신 고시엔 구장]] 원정 경기에서 [[사이클링 히트]]를 기록한 바 있다.[* 재밌는 건 사이클링 히트를 3루타로 달성했는데, 이때 3루수 수비를 보고 있던 게 [[카케후 마사유키]]였다. 이는 나중에 [[후쿠도메 고스케]]가 경신하기 전까지 일본프로야구 최고령 사이클링 히트이기도 했다.] 1984년엔 선수 겸 타격 코치로 뛰면서 그 해 팀의 일본시리즈 제패에 기여하기도 하였다. 1985년엔 [[장훈(야구선수)|장훈]]에 이어 역대 두 번째로 통산 '''500[[홈런]], 200[[도루]]'''를 기록 하였다.[* 이 기록은 현재까지 장훈과 야마모토, 그리고 [[기누가사 사치오]] 3명만 보유하고 있다.] 1986년 시즌 [[센트럴리그]] 우승 후 야마모토는 은퇴 의사를 표명했고 그 해 일본시리즈 패권은 8차전 까지 가는 접전 끝에 [[세이부 라이온즈]]에 넘겼지만, 히로시마의 코칭스태프와 동료들은 야마모토를 [[헹가래]] 쳐주며 그의 현역 마지막 무대를 빛내주었다. 야마모토는 은퇴 기자 회견에서 "나 야마모토 코지는 정말 행복한 남자입니다"라며 감격과 아쉬움이 섞인 눈물을 흘렸다. 다만 이 해 일본시리즈에서 히로시마가 세이부에게 [[리버스 스윕|1무 후 3연승으로 우승 직전까지 갔다가 4연패를 당해 허무하게 물러나면서]] 본인에게나 카프에게나 아쉬운 마무리가 되고 말았다.. 18시즌 통산 '''2339안타, 타율 0.290, 536홈런[* 이는 일본 프로야구 대졸 출신 선수로는 최다 기록이다.], 1475타점, 231도루''' 의 기록을 남겼다. 또한 수위타자 1회에 센트럴리그 MVP 2회, 4번의 홈런왕, 3번의 타점왕을 기록했는데 홈런왕, 타점왕 타이틀 획득과 통산 홈런의 70%를 전부 30대 이후에 기록한 전형적인 '''대기만성'''형 선수였다. 히로시마 구단은 창단 이후 최초로 야마모토의 등번호 8번을 [[영구 결번/스포츠|영구 결번]] 으로 지정하며 그의 업적을 치하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